제목 : | 영릉(세종대왕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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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성우 작성일 :07-08-22 22:54 조회 : 2,823회 댓글 : 5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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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님의 댓글
박성우 | 작성일
영릉(英陵, 제4대 세종, 소헌왕후)
사적 제195호(여주)
조선 제4대 세종(재위 1418∼1450)과 비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능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고 제작하였으며, 아악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여 4군과 6진을 개설,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 기르고 활자를 개량하여 월인천강지곡(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노래), 삼강행실도(윤리 덕행을 찬양한 책), 의방유취(의학백과사전) 등 수 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어진 성덕이 하늘같이 높았다.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헌릉 서쪽 산줄기에 쌍분인 영릉을 만들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능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능으로 문종 즉위년(1450)에 왕이 죽자 합장하였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서로 다른 방을 갖추고 있는 합장릉을 하고 있다.
능제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능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겼다.
합장릉이기 때문에 혼유석이 두 좌가 있고 능의 주변에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동지주에 12지를 문자로 새겨 넣었다. 혼유석 밑받침 돌(고석)은 4개이며, 장명등은 팔각으로 되어있다. 석양, 석호, 석마, 문인석, 무인석을 배치하였고, 능 뒤에는 나지막한 능담을 둘렀다. 능 밑에는 정자각을 세워서 제사를 지낼 때는 이 정자각에서 지내고 능봉상까지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다. 정자각 앞에는 수복방을 지어 능을 지키게 했고, 수라간을 두어 제사 음식을 만들게 하였으며, 정자각 동편에는 능비를 세웠다. 능역을 표시한 홍살문이 정자각 앞에 서있고 능역 입구에는 재실이 있다. 조선 왕조의 능은 능 밑이 습지가 되어야 하는데 이곳도 숲지로서 오리나무가 운치있게 숲을 이루고 있고 능산에는 노송이 우겨져 있다.
여주로 천장하기 전에 있던 석물인 혼유석, 명등석(장명등), 망주석, 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나 1973년에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훈민문·세종대왕동상·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 것이다.
민영종님의 댓글
민영종 | 작성일
세종대왕릉에 대해서 자세한 역사적 설명까지 해주시는 세심함에 감사합니다.
많은 유익한 정보를 얻어갑니다...
박성우님의 댓글
박성우 | 작성일
여주에 대해서 모르는것이 저도 너무 많습니다.
지역내 산재한 문화,관광,유적지를 모두 담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윤영순님의 댓글
윤영순 | 작성일예전에 봤던곳이새록새록 생각이 나네요....
박성우님의 댓글
박성우 | 작성일
윤영순님 옛날 생각하며 다시 한번 들려 보세요.
감사 합니다.